이광수 <무정> [과제] 이것은 똥이다


이형식
김장로(김광현) 그의 딸 김선형, 양인 윤순애
기자 신우선
이형식의 은인 박진사(박응진), 그의 딸 박영채(계월향)
영채의 형님 기생 월화(자살), 노파
나폴레옹을 좋아하는 김종렬과 친구 김계도 그리고 공부하는 이희경
영채를 겁탈하려던 배명진과 김현수
영채를 구해준 병욱, 그리고 영채를 좋아하는 것 같은 병욱의 오빠 병국.

오늘 아침에 핀 꽃은 바람도 비도 시듦도 모른다.

53중에서

사람의 생명은 우주의 생명과 같다. 우주가 만물을 포용하는 모양으로 인생도 만물을 포용한다. 우주는 결코 태양이나 북극만으로 그 내용을 삼지 아니하고 만천의 모든 성신과 만지의 모든 말물로다 그 내용을 삼는다. 그러므로 창궁에 극히 조그마한 별로 우주의 전생명의 일부분이요 내지 지상의 극히 미세한 풀잎 하나 티끌 하나도 모두 우주의 전생명의 일부분이라. 태양이 지구보다 위대하니 태양의 우주의 생명에 대한 관계가 지구의 그것보다 크다고는 할지나 그렇다고 태양만이 우주의 생명이요 지구는 우주의 생명에 관계가 전무하다고 못할지라. 또 태양계에 있어서는 태양이 중심이로되 무궁대한 전우주에 대하여는 태양 그 물건도 한 티끌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라. 이와 같이 사람의 생명도 결코 일 의무나 일 도덕률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인생의 만반의무와 우주에 대한 만반의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충이나 효나 정절이나 명예가 사람의 생명의 중심은 아니니 대개 사람의 생명이 충이나 효에 있음이 아니요 충이나 효가 사람이 생명에서 나옴이라. 사람의 생명은 결코 충이나 효 나의 하나에 부친 것이 아니요 실로 사람의 생명이 충, 효, 정절, 명예 등을 포용하는 것이 마치 대우주의 생명이 북극성이나 백랑성이나 태양에 있음이 아니요 실로 대우주의 생명이 북극성과 백랑성과 태양과 기타 큰 별, 잔별과 지상의 모든 미물까지도 포용함과 같다.
  사람의 생명의 발현은 다종다양하니 혹 충도 되고 효도 되고 정절도 되고 기타 무수무한한 인사현상이 되는 것이라. 그중에 무릇 민족을 따라 혹은 국정을 따르고 혹은 시대를 따라 필요상 이 무수무궁한 인사현상 중에서 특종한 것 일개나 또는 수개를 취하여 만반인사행위의 중심을 삼으니 차소위 도요 덕이요 법이요 율이라. 물론 사회적 생활을 완성하려면 그 사회의 각원이 그 사회의 도덕법률을 권권복응함이 마땅하되 그러나 결코 이는 생명의 전체는 아니니, 생명은 하여한 도덕법률 보다도 위대한 것이라. 그러므로 생명은 절대요 도덕법률은 상대니 생명은 무수히 현시의 그것과 상이한 도덕과 법률을 조출할 수 있는 것이라. 이것이 형식이가 배워 얻은 인생관이라.

110중에서
육체와 정신이 한데 합한 사랑이라야 마치 우주와 같이 넓고 바다와 같이 깊고 봄날과 같이 조화가 무궁한 사랑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입으로 말은 아니 하지마는 속으로 밤낮 구하는 것은 이러한 사랑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마치 금과 같고 옥과 같아서 천에 한 사람, 십년 백 년에 한 사람도 있을 듯 말 듯 하다. 그래서 여자는 춘향을 부러워하고 남자는 이도령을 부러워한다. 자기네가 실지로 그러한 사랑을 맛보지 못하매 소설이나 연극이나 시에서 그것을 보고 좋아서 웃고 울고 한다. 조선서는 천지개벽 이래로 오직 춘향, 이도령의 사랑이 있었을 뿐이다.

오슨 웰스 <시민 케인>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너도 나를 사랑해야 해 [리뷰]영화, 이것은 삶이다


"내가
 널 사랑하니까 너도 날 사랑해야 해. 무슨 말 인지 알겠어?" 
아멜리 노통브의 「사랑의 파괴」는 신랄하고 짜릿한 소설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문구를 체화한 것이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 케인이다.
케인은 이미 위와 같은 사랑 방식이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할 뿐이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다. 왜? 이 막가파식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랑은 교감이 아니라 '수집'이 되어버린다. 케인이 조각품을 사모으는 것 처럼.

그의 광적인 수집욕과 애정 받기에 집착하는 것은 그가 갖고자 했지만 끝내 가질 수 없었던 것 때문이었다.
그것은 Rosebud. 어린 시절에 받지 못했던 사랑의 원형이었다.

스파이크 존즈 <존 말코비치 되기>, 사랑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가 되어도 될까 [리뷰]영화, 이것은 삶이다



  자기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만큼 지루하고 무력한 것이 어디 있을까. 작 중 인물 크레이그는 찌질했기 때문에 맥신의 마음을 잡지 못했고 그래서 존 말코비치가 되길 원했다. 타 인물들도 각자의 이유로(사랑, 영생) 존 말코비치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길 져버리는 일은 무슨 결과를 불러오게 될까?
  이 영화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야기를 풀자면 참 지루할 것이다. 사랑의 문제, 육체와 정신의 문제, '나'라는 정의의 문제 등등. 하지만 영화는 이 철학의 무게를 왈가왈부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답이나 교훈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사를 질주한다. 그래서 재미있다.
  굳이 몇 마디를 보태자면, 육체라는 것은 정체성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는 것이다. 물론 이마저도 확실하지는 않다. 존 말코미치의 내면에 있는 크레이그와 오래 산 맥신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창동, <시> 시가 죽은 세계에서 시가 되어 아름다운 추락에 이르다. [리뷰]영화, 이것은 삶이다






1. ‘ 가 될 수 있을까

 



  영화 속 김용탁 시인의 시 강좌에서 시라는 것은 주의 깊게 을 통해 일상 속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본다는 건 내면에 깊게 이입하는 추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시 강의의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 발표에서 보여주듯 단순히 행복한 기억이라기보단 내면에 침투하여 존재를 울리는 것으로 이해된다.

  미자는 수업에서 배운 것을 너무 깊게 받아들이고야 만다. 그래서 계속 보려고애쓴다.

  미자는 성폭행 후유증으로 자살한 희진을 보려고 애쓴다. 교회에 가보고 성폭행의 장소였던 과학실에도 가본다. 심지어 희진이 투신했던 곳에도 가본다. 그 곳에서 익사한 희진을 재현하려는듯 미자는 비를 가만히 맞고 있는다. 희진을 기억하기 위해 희진의 사진을 식탁에 놓아두기까지 한다. 미자는 희진을 필사적으로 재현하듯이 추체험한다. 그렇게 미자는 희진이 된다.

  성폭행 사건을 그저 처리해야 할 문제 정도로 여기는 가해자 가족 모임은 희진에게 깊게 몰입하려는(그리고 몰입에 성공한) 미자와는 대척점에 놓이게 되는 셈이다.

 



2. 시, 그 무거움

 


  미자의 진정성 앞에서 낭송회에서 읊어지는 시들은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낭송회의 시들의 외양은 시(poet)이지만 시적(poetic)이지는 않는다. (소위 겉멋만 들었다고 표현하는 그런 시다)

  필사의 을 통해 미자는 희진이 되는 경지에 이른다. 자신의 손자를 고발하는 것은 정의감의 발로였기 보다는 진정성 있게 시를 쓰려고 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미자는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시를 쓴 사람은 미자 뿐이다. 아래에 그 시를 남겨본다.

  










아네스의 노래 / 詩.  이창동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마음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18. 09. 14 [일기]생활에 대한 짧은 단상

극과 극이다.

한국문학연구 수업을 담당하는 교수는 철저한 하이데거주의자이고 고전 예찬론자이다.
그는 자신의 연구물을 자랑스러워하며 요즘 사람들이 생각 없이 산다며 실존에 위기에 처해있다고 침을 튀기며 강연했다.
덧붙여 지하철에서 책을 읽지 않고 핸드폰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혐오하는 듯한 발언을 시원하게 했다.
그리고 인간이 기계로 치환될 수 없다는 의견을 지루하게 내뱉었다.

반면 한국영상문학을 담당하는 교수는 철저한 현실주의이자 '고상한 문화'를 해체하는 철학자를 인용해가며 강연했다.
고상한, 특정 계층의 고급 문화를 깨부수는 호쾌함이 매력적이었다.
활자는 죽은 매체이니 어서 영상에 익숙해지라는 말은 고개를 끄덕일수밖에 없었다.

아무대로 후자 쪽에 끌리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양 쪽 다 틀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존중이나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다.
나는 전자의 사람들이 도대체 언제쯤 나르시즘적인 인간주의를 언제 탈피할 것인지 궁금하고
후자의 사람들에겐 자신들이 주장한 이론에 의해 자신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결과에 도달할텐데 과연 어느 수준까지 이를 용인할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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